옛날부터 조선팔경(朝鮮八景)에 손꼽히는 속리산은 해발 1057m로 영봉(靈峰)과 영봉이 잇닿는 명산으로서 이곳에 내려오는 유명한 시(詩)가 있으니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현강왕 12년(서기 886년)에 속리산 묘덕암에 와서 산의 경치를 구경하고
도불원인 인원도(道不遠人 人遠道) 산비리속 속리산(山非離俗 俗離山)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道)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라는 시를 남겼다.
속리산이라는 산명(山名)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數石記)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76)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끓고 울었다. 그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에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辭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生)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니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아주고 계(戒)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洲 : 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數)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때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여일 리(離), 뫼 산(山) 자(字)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도불원인 인원도(道不遠人 人遠道) 산비리속 속리산(山非離俗 俗離山)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道)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았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라는 시를 남겼다.
속리산이라는 산명(山名)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數石記)에 의하면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九峰山)이라 불리어 오다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에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76)에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을 주조하여 봉안하고 금산사에서 지금의 속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율사 앞에 와서 무릎을 끓고 울었다. 그 탄 사람이 내려서 "이 소들이 어째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에서 오십니까?"하고 물었다. 율사는 " 나는 금산사의 진표라는 승(僧)인데 내가 일찍이 변산(邊山)의 불사의방(不辭議房)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과 진생(眞生)을 받아 절을 짓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끓어 앉아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나서 "짐승도 이러한 신앙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니 어찌 신앙심이 없겠습니까?"하고 곧 낫을 들어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 율사는 자비스런 마음으로 다시 머리를 깍아주고 계(戒)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시해 두고 다시 명주(溟洲 : 지금의 강릉)를 거쳐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數)를 창건하였다 한다.
이때 진표율사로 인하여 소달구지를 탄 사람이 지극한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 속(俗)과 여일 리(離), 뫼 산(山) 자(字)로 속리산이라는 지명을 얻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